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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 Insight#26

30장짜리 기획서 vs. 고객 인터뷰 10번

고객 문제정의 · 고객 인터뷰 · 제품과 사업2026.07.31

최대 1억 원을 받을 수 있는 정부지원사업 신청서에 한 달을 공들이고, 제출 버튼만 남겨둔 채 휴지통에 넣었습니다.

20년 차 UX 리서처 서원용님의 질문 하나 때문이었습니다.

“고객을 만나봤어요?”

어이가 없었어요. 그 질문은 제가 제품을 만들 때마다 팀원들 귀에 못이 박히도록 반복하던 말이었거든요. 회의실에서 고객을 상상하지 말고 직접 만나 문제를 확인하라고요.

그런데 정작 제 사업 앞에서는 제가 고객을 안다고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15초 요약

제품과 서비스를 만드는 일은 고객에게서 출발해야 합니다. 하지만 고객 인터뷰도 시작일 뿐입니다.

누구를 만나 어떤 질문으로 어떤 행동과 맥락을 확인했는지, 그 답을 어떻게 해석해 실제 결정과 결과물로 바꿨는지까지 이어져야 합니다. 문제정의서와 PRD, 사업계획서와 랜딩페이지는 그 자체로 근거가 아닙니다. 고객에게서 확인한 사실과 그 사실을 해석한 판단을 담는 결과물입니다.

Y's Insight

저는 고객보다 문서에서 시작했습니다

제가 만들고 싶은 것은 명확했습니다. 이미 몇 년씩 일해 자기만의 맥락과 복잡한 문제를 가진 사람에게 멘토가 깊이 관여하는 서비스. 지식을 전달하고 끝나는 강의가 아니라, 실제 일과 커리어가 달라질 때까지 함께 부딪히는 환경을 만들고 싶었어요.

큰 자본이 필요한 사업도 아니었고 시작할 자금도 충분했습니다. 그런데 마침 예비창업패키지 모집 시점과 맞았어요. 받을 수도 있는 지원금을 굳이 마다할 이유가 있나 싶었습니다. 내 돈보다 정부지원금으로 시작하는 게 더 영리한 사업가의 선택처럼 느껴졌어요.

더 솔직히 말하면 ‘공짜 돈인데 왜 안 받아?’였습니다.

사업계획서와 기획 문서는 직장 생활 내내 지겹도록 써왔습니다. 1주일 만에 30장이 나왔고, 제출 가능한 10장으로 줄이는 데 3주가 더 들었어요. 그런데 문서는 점점 번듯해지는데 방향은 점점 이상해졌습니다. 고객의 문제보다 확장성을, 제가 만들고 싶은 변화보다 사업성을, 제 확신보다 심사위원의 입맛을 먼저 생각하고 있었어요.

문제를 확인한 뒤 문서를 쓴 게 아니었습니다. 이미 만들기로 한 서비스를 놓고, 그럴듯한 문제와 근거를 거꾸로 끼워 맞추고 있었습니다.

일터에서는 사업계획서뿐 아니라 문제정의서와 PRD, 디자인 시안, 캠페인 기획서, 영업 제안서를 씁니다. 하지만 순서를 거꾸로 세우면 똑같은 일이 벌어져요. 이미 만들기로 한 기능과 실행하기로 한 아이디어를 놓고 고객 문제를 끼워 맞추고, 내가 내린 결정을 정당화할 데이터만 찾습니다. 문서는 점점 탄탄해지는데 정작 풀어야 할 고객 문제에서는 멀어집니다.


고객을 만났다는 것도 착각이었습니다

원용님의 질문에 저는 당연하다는 듯 답했어요.

“그럼요. Y-BAR 동료들과 매일같이 소통하는걸요.”

그들도 분명 중요한 고객입니다. 하지만 이미 제 철학에 공감해 Y-BAR를 선택한 사람들이었어요. 저는 그들과 Y-BAR를 더 잘 운영하기 위한 대화를 하고 있었습니다. 멘타라는 새로운 서비스가 누구의 어떤 문제를 풀어야 하는지 확인하는 대화는 아니었어요.

누구를 만났는지도 달랐고, 만난 목적도 달랐습니다.

원용님이 묻는 것은 아직 저를 모르는 잠재 고객을 만나, 제가 만든 것을 설명하지 않고 그들이 실제로 겪는 문제부터 확인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할 말이 없었어요. 프로덕트 일을 오래 했고 수없이 많은 문제정의서를 썼지만, 정작 제 사업 앞에서는 이미 저를 선택한 사람들의 말만 듣고도 고객을 안다고 착각했습니다.

고객을 자주 만났다는 이유만으로 고객을 안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헤비유저만 만났는지, 불만을 접수한 고객만 만났는지, 이미 만든 기능의 사용성을 확인했는지, 아직 풀리지 않은 문제를 탐색했는지에 따라 얻는 답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인터뷰는 누구를 왜 만날지에서 시작됩니다

고객을 만나기로 했다고 바로 인터뷰 일정을 잡지는 않았습니다. 원용님과 먼저 누구를 만나고, 무엇을 확인하고, 어떤 질문으로 그 사람의 실제 경험을 꺼낼지부터 다시 짰어요.

누구를 만날 것인가. 그 고객에 관해 무엇을 알고 무엇을 추측하고 있는가. 이번 인터뷰를 통해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는가. 고객의 의견이 아니라 최근의 실제 행동과 현재 해결 방식을 확인하려면 무엇을 물어야 하는가.

이 질문이 정리되지 않으면 인터뷰는 쉽게 제품 설명회나 기능 호감도 조사로 바뀝니다. “이런 기능이 있으면 쓰시겠어요?”라고 물으면 대부분 좋은 이야기로 답해줘요. 하지만 그 대답은 실제로 시간과 돈을 쓰겠다는 행동이 아닙니다.

그래서 아이디어를 설명하기보다 최근 어떤 상황에서 막혔는지, 그때 무엇을 했는지, 지금은 어떻게 해결하고 있는지, 왜 그 방식으로도 충분하지 않았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렇게 10명 안팎을 심층 인터뷰하고, 인터뷰에서 발견한 패턴이 더 넓게도 나타나는지 확인하기 위해 500명 규모의 설문을 진행했습니다.

인터뷰 일정을 잡기 전에 필요한 건 이번 리서치로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하는지 정하는 일입니다. 타깃을 좁힐 것인지, 문제의 우선순위를 바꿀 것인지, 기능을 만들 것인지, 메시지와 제안을 바꿀 것인지가 선명해야 누구를 만나 무엇을 물어야 할지도 선명해집니다.


고객의 말은 답이 아니라 원천 데이터였습니다

어느 정도 경력을 쌓은 사람들을 관통하는 문제는 세 가지였습니다.

  1. 일을 많이 하고 잘 해내는 것과 그 일이 성과로 이해되는 것 사이에 간극이 있었습니다.

  2. 책임과 역할은 넓어졌지만 기대 결과·권한·평가·보상은 따라오지 않았습니다.

  3. 조직의 요구를 따라가는 동안 자신이 원하는 역할과 커리어 선택 기준은 흐려졌습니다.

그렇다고 고객들이 “고관여 멘토링 플랫폼을 만들어주세요”라고 말한 것은 아닙니다. 고객은 자신이 어느 상황에서 막혔고, 지금 어떻게 해결하고 있으며, 무엇이 여전히 풀리지 않았는지를 보여줬습니다.

그 말을 어떤 문제로 정의하고, 어떤 방식으로 풀 것인지는 제 판단이었습니다.

저는 이 문제가 지식 하나를 더 가르치는 강의로는 풀리지 않는다고 해석했습니다. 이미 일을 잘해온 사람들이 다음 단계에서 막히고 있었고, 각자의 실제 일과 커리어 안으로 멘토가 깊이 들어가 함께 적용하고 깨지고 다시 고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판단했어요.

고객이 솔루션을 정해준 게 아닙니다. 고객에게서 출발했기 때문에 제가 내려야 할 판단이 선명해졌습니다.

기획하든 디자인하든, 개발하든 마케팅하든, 영업하거나 사업하든 마찬가지입니다. 고객의 요청을 그대로 실행하는 것이 고객 중심은 아닙니다. 고객의 말에서 상황과 행동, 현재 대안과 해결되지 않은 간극을 읽고, 무엇을 어떻게 풀 것인지 판단해야 합니다.


근거는 실제 결정을 바꿔야 합니다

인터뷰를 잘 마치고 좋은 인사이트를 얻었다는 감상으로 끝나면 리서치 기록만 남습니다. 확인한 근거가 실제 결정과 결과물을 바꾸어야 합니다.

생각했던 고객이 실제 고객이 아니라면 타깃을 바꿔야 합니다. 더 급한 문제가 발견됐다면 문제정의서를 갈아엎어야 해요. 고객이 이미 충분히 잘 해결하고 있다면 기능을 만들지 않는 결정도 해야 합니다. 핵심 문제가 달라졌다면 우선순위와 성공 지표, PRD와 디자인, 마케팅 메시지와 영업 제안까지 달라져야 합니다.

인터뷰 전과 후의 문서가 똑같다면 의심해봐야 합니다. 고객에게서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지 못했거나, 발견하고도 이미 내린 결정을 놓지 못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저는 사업계획서를 제출하지 않았습니다. 최대 1억 원의 지원금은 공짜 돈이 아니었어요. 받는 순간 심사위원에게 써낸 확장성과 일정은 제 사업이 지켜야 할 약속이 되고, 그 방향을 위한 행정까지 떠안아야 했습니다. 고객을 만나 가야 할 방향이 선명해졌는데, 돈을 받기 위해 다시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갈 이유는 없었습니다.

Mentor와 Mentee가 만나 Aha Moment를 이루는 곳. 세 단어를 이어 Mentah, ‘멘타’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멘토가 정답을 말하고 떠나는 곳이 아니라, 멘토와 멘티가 실제 문제를 함께 파고들며 각자의 ‘아하’를 만드는 곳입니다.

멘타는 사업계획서가 아니라 고객에게서 출발했습니다. 하지만 고객을 만난 것만으로 태어난 것은 아닙니다. 누구를 만나 무엇을 확인할지 설계하고, 들은 내용을 해석해 문제를 정의하고, 그 판단을 실제 서비스로 옮겼기 때문에 태어날 수 있었습니다.

제 사업의 시작점을 다시 세워준 이 방식을 저만 가져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원용님에게, 고객을 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직접 고객을 만나 자기 문제를 다시 정의하는 과정을 멘타에서 만들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이런 액션을 취해보세요

다음 고객 인터뷰 전후로 아래 다섯 가지가 이어지는지 확인해보세요.

  1. 누구를 만나야 하는가

    연령과 직무 같은 조건만으로 정하지 마세요. 지금 그 문제를 실제로 겪고 있고, 어떤 방식으로든 해결하려고 행동한 사람을 찾아야 합니다. 헤비유저와 이탈 고객, 구매한 사람과 구매하지 않은 사람이 들려주는 문제는 서로 다릅니다.

  2.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는가

    인터뷰를 마친 뒤 내려야 할 결정을 먼저 정하세요. 타깃을 좁힐 것인지, 문제의 우선순위를 바꿀 것인지, 무엇을 만들거나 제안할 것인지 판단하기 위해 알아야 할 것이 리서치의 기준이 됩니다.

  3. 무엇을 물어야 하는가

    “이 기능이 필요하세요?”보다 “가장 최근에 이 문제를 겪은 게 언제인가요?”라고 물어보세요. 의견보다 실제 상황과 행동, 현재 해결 방식, 해결되지 않은 지점을 확인해야 합니다.

  4.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고객이 한 말과 내가 내린 해석을 분리해서 적으세요. 반복되는 패턴뿐 아니라 서로 다른 답과 예상에 맞지 않는 사례도 봐야 합니다. 듣고 싶은 말만 모으면 인터뷰는 근거가 아니라 확증 편향이 됩니다.

  5. 무엇을 바꿔야 하는가

    인터뷰 전후로 타깃, 문제정의, 우선순위, 성공 지표와 결과물 중 무엇이 달라졌는지 확인하세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면 처음부터 답을 정해놓고 고객에게 확인만 받은 것은 아닌지 의심해야 합니다.

근데 말이죠

모든 사람이 고객 인터뷰를 직접 진행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UX 리서처와 함께할 수도 있고, 리서처가 주도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리서치 결과를 자기 일의 결정으로 옮기는 책임까지 넘길 수는 없습니다. PM이라면 문제정의와 우선순위로, 디자이너라면 경험과 화면으로, 개발자라면 기술적 선택과 구현으로, 마케터라면 타깃과 메시지로, 영업이라면 제안과 고객 선별로, 사업가라면 시장과 사업모델에 대한 판단으로 연결해야 합니다.

고객의 말도 정답은 아닙니다. 한 사람의 인상적인 말에 홀리는 것도 또 다른 착각이고, 열 명에게서 같은 패턴이 나왔다고 시장 전체의 문제라고 단정할 수도 없어요. 정성조사로 문제의 맥락과 원인을 깊이 파고, 정량조사로 그 패턴의 규모와 분포를 확인해야 합니다. 실제 결과물을 내놓은 뒤에는 고객의 행동과 성과 지표로 다시 검증해야 합니다.

고객에게서 출발해야 합니다. 그러나 거기가 시작입니다.

누구를 만나고, 무엇을 묻고, 어떻게 해석해, 어떤 결정과 결과물로 바꿨는지. 그리고 그 결과가 실제 고객에게 통했는지 다시 확인하는 것까지가 고객 문제정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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