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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 Insight#21

주니어라는 막을 내리며, 쓴 엔딩 크레딧을 올립니다

성장 · PM역량2026.06.26

Lead PM으로서 아직 증명하지 못했다는 피드백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나를 만든 리더들에게로 돌아가, 무엇을 가져가고 무엇을 다시 쓸지 정리했습니다.

얼마 전,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마음이 쓰린 피드백을 받았습니다. Lead PM으로서 아직 역량을 충분히 증명하지 못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듣고 나니 두 가지 질문이 남았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여태 잘해온 건 무엇이고, 지금 내가 갈피를 못 잡는 건 왜일까.

주니어라는 막이 내려가고 새 막이 오르는 이 시점에, 그 답을 찾으려고 나를 만든 리더들에게로 거슬러 올라가 봤습니다. 일종의 엔딩 크레딧처럼요.

15초 요약

  • 마음 쓰린 피드백의 정체는 이것이었습니다. 명확한 목표와 깔끔한 지표 속에서 정면 돌파해온 방식이, 더는 옳고 그름을 깔끔하게 나눌 수 없는 AI 시대의 복잡한 문제 앞에서 한계를 만난 것.

  • 그렇다고 처음부터 다시 쌓는 건 아닙니다. 변하지 않는 내 강점을 토대로, 리더들에게 받은 것을 AI 시대의 언어로 다시 번역하는 게 다음 막의 과제입니다.

알아두면 좋은 용어

MECE (Mutually Exclusive, Collectively Exhaustive)
서로 겹치지 않으면서 빠짐없이 나누는 분류 원칙입니다. 문제가 명확할 땐 강력한 도구지만, 변인이 수백 개라 무엇이 옳고 그른지 깔끔하게 가를 수 없는 문제 앞에서는 한계가 드러납니다. 이번에 받은 피드백의 핵심이 정확히 이 지점이었습니다.

심리적 안정감 (Psychological Safety)
실수하거나 다른 의견을 내도 비난받지 않을 거라는 팀 내 믿음입니다. 에이미 에드먼슨이 정의한 개념으로, 팀의 학습 속도와 직결됩니다. 관대함을 가르쳐준 리더가 사실 만들고 있던 게 바로 이것이었다는 걸, 한참 뒤에야 알았습니다.

롤 모델 · 안티 롤 모델 (Role Model · Anti-role Model)
닮고 싶은 사람만 스승이 되는 게 아닙니다. "나는 저렇게는 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심어준 사람도 내 방식을 만든 안티 롤 모델입니다. 성장의 회고에서는 둘을 같은 무게로 다뤄야 그림이 정직해집니다.

Y's Insight

"특공대"라는 피드백, 그리고 내가 잘했던 것

현재 리더가 준 피드백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들으면서 생각이 많아져 100% 정확하진 않을 겁니다.

"파니는 그동안 특공대처럼 성장해 온 것 같아. 문제가 생기면 정면으로 돌파하고, 추진력으로 끝까지 밀어붙이는 사람. 그런데 그게 가능했던 건 목표가 명확했기 때문일 거야. 해야 할 일이 정해져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달라."

그의 요지는 이랬습니다. 특히 이 AI 시대에는 복잡한 문제를 '맞다'와 '맞지 않다'로 MECE하게 나눌 수 없다는 것. 어떤 순간에는 인과관계도 상관관계도 분명히 밝히지 못한 채 해봐야 아는 것들이 생기고, 일단 해보고 Real Impact를 기다리는 편이 더 빠를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돌아보면 저는 늘 명확하게 일을 정의할 수단과 환경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Raw Data라고 생각했던 것들조차, 사실은 Sample Size가 충분히 확보되는, 프로세스가 아주 잘 닦인 회사에서나 가능했던 것이었습니다. 지금은 다릅니다. 수백 개의 변인 중에 공통인자만 추리고 나머지는 엣지 케이스로 치부해 후순위에 두기엔, 너무 복잡한 비즈니스를 풀어야 하는 상황입니다.

그렇다면 저는 정말 모든 걸 처음부터 다시 쌓아야 할까요?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배운 걸 되짚으며 다시 길을 찾는 중인데, 변하지 않는 내 강점 세 가지가 보였습니다.

  • 스스로 판단하는 힘

  • 설득력 있게 거절하는 능력

  • 중요한 것을 위한 논리를 만들어내는 능력

AI로 일하는 방식이든, 비즈니스든, 운영비 절감이든, B2B에서 갑이 아니라 을·병·정의 위치에서 고객사 Churn까지 고려해야 하는 상충하는 지표 속이든 — 저 세 가지는 변하지 않습니다. 이걸 토대 삼아, 나를 만든 리더들의 엔딩 크레딧을 올려봅니다.


첫 번째 이름: 오기로 나를 움직인 리더

처음 만난 리더는 칭찬이 인색한 사람이었습니다. "난 지금 네가 하는 말이 이해가 안 되는데?"라는 질문을 입에 달고 살았고, 제가 며칠을 갈아 넣은 이메일이나 기획서를 5분 만에 반려하기도 했습니다. 그때는 솔직히 분했습니다. 그런데 그 분함이 묘하게 연료가 됐습니다. "다음엔 저 리더에게서 인정하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게 해보겠다."라는 오기로 일했고, 그 사이에 내 기준선이 한 단계씩 올라가 있었습니다.

지금 와서 보면 그분이 준 건 동기부여가 아니라 기준의 높이였습니다. 적당히 괜찮은 것과 반론을 통과한 것의 차이를 몸으로 알게 해준 사람입니다. 그만큼 치열하게 배우기도 했습니다. 문서의 서열, 구조, 전달력 있게 쓰는 법까지 어마어마하게 엄격한 기준으로 촌철살인 같은 피드백을 줬습니다. 왜 저는 더 완벽할 수 없는가에 대한 자괴감과, 서식 하나하나조차 예쁘지 않아 따라 하느라 급급했던 그 어설픈 문서가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다만 이 방식엔 분명한 그림자가 있습니다. 오기는 연료지만 금방 타버립니다. 그래서 이 리더는 내게 롤 모델이자 안티 롤 모델입니다. 기준을 높게 잡는 법은 가져오되, 그 기준을 전달하는 방식은 버리기로 했습니다.


두 번째 이름: 관대함을 가르쳐준 리더

두 번째 리더는 정반대였습니다. 내가 일정을 놓치거나, 불가능한 것을 불가능하다고 말할 때도 인내심 있게 끝까지 들어줬습니다. 일을 진행했지만 유관부서의 우선순위가 맞지 않아 목표 일정보다 한 달이 밀렸을 때도, 먼저 묻는 게 "왜 그랬어요?"가 아니라 "그래서 뭘 알게 됐어요?"였습니다. 실수가 처벌이 아니라 데이터가 되는 경험을 그때 처음 했습니다.

그 관대함 덕분에 저는 더 과감한 가설을 던질 수 있었습니다. 틀려도 잘릴 일이 아니라는 안전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야 그게 심리적 안정감이라는 이름을 가진, 팀의 학습 속도를 결정하는 자산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오해하면 안 되는 건, 관대함이 무르다는 뜻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분은 결과에는 엄격했지만 사람에게는 너그러웠습니다. 실패를 추궁하지 않되, 학습하지 않는 건 그냥 두지 않았습니다. 이 구분을 내 안에 새기는 데 가장 오래 걸렸습니다. 그리고 이분의 추천 덕분에, 저는 이후 정식으로 Coupang의 Product 조직으로 갈 수 있었습니다.


세 번째 이름: 엄격함과 명확함을 새겨준 리더

세 번째 리더는 모호함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기능 왜 만들어요?"에 내가 두 문장 이상 설명하기 시작하면 바로 끊었습니다.

"여기서 말씀하신 케이스에는 이런 게 반영되거나 고려됐어요? 이해관계자도 Align 했어요? 어떤 데이터까지 봤어요? VOC(Voice of Customer) 수치는 정말 줄었어요?"

야박하다고 느낄 새도 없었습니다. 모두 맞는 말이었고, 반박할 생각조차 들지 않았습니다. 일할수록 그녀의 피드백이 무섭게 맞아 들어갔습니다. 정의가 흐릿한 문제는 흐릿한 채로 팀 전체로 번지고, 모두가 다른 그림을 머릿속에 그린 채 몇 주를 달립니다. 그분에게 배운 건 문제를 한 문장으로 자르는 명확함, 그리고 그 한 문장을 끝까지 책임지는 엄격함이었습니다.

엄격함과 차가움은 다르다는 것도 그때 배웠습니다. 그녀의 엄격함은 사람을 깎으려는 게 아니라, 모두가 같은 곳을 보게 하려는 친절에 가까웠습니다. 대신 나약함은 절대 핑계나 Excuse가 될 수 없다는 것 — 그녀가 살펴보라던 어떤 데이터보다 선명하게 와닿았던 교훈이었습니다.


네 번째 이름: 협업의 즐거움을 알게 한 리더

이 리더는 사실 세 번째 리더와 같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그녀 역시 다른 리더가 되어 있었고, 그래서 또 새로운 걸 배울 수 있었습니다. 가까이서 지켜보며, PM이 무겁고 외로울 수 있는 직무라는 통념을 깨준 사람입니다. 그전까지 저는 PM을 "혼자 다 짊어지고 설득하는 사람"으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리더는 디자이너, 개발자, 데이터 분석가를 한 문제 앞에 둘러앉히고, 각자가 자기 영역에서 더 똑똑해지게 만들었습니다. 권한을 위임하고, 문제를 같이 관찰하고, How-To를 나 혼자가 아니라 그들도 함께 고민하게 만드는 방법을 그때 터득했습니다.

무신사에서 엑셀로만 처리하던 반품을 시스템으로 만들 때였습니다. 어느 밤은 수기 데이터 지옥에 눈물이 찔끔 나기도 했지만, 돌아보면 그 모든 게 쾌감이었습니다. 프로덕트 디자이너와 함께 몇몇 물류센터에 가서 엑셀로 반품·재고를 처리하는 과정을 지켜보며, 필요한 일과 버릴 일을 구분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As-Is 프로세스를 기반으로 한 유저 시나리오를 제시했는데, 디자이너는 그 단계를 획기적으로 간소화하는 방안을 가져와 줬습니다. 마우스와 키보드, 바코드 스캐너를 오가던 작업자들이 이제 바코드 스캐너 하나로 모든 작업을 처리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아직도 그 화면을 보던 짜릿함이 생각납니다.

이게 다가 아니었습니다. 시스템 인터랙션과 플로우를 획기적인 모듈로 설계해준 엔지니어 덕분에, 이후 비즈니스에도 확장성 있게 적용할 발판이 됐습니다. 저는 모든 걸 순서대로 생각했는데, 그분은 그걸 독립적인 시스템으로 만들어 줬습니다.

이런 식으로 회의가 끝나면 내 머릿속 그림보다 더 좋은 안이 나와 있었고, 무엇보다 그 과정이 재미있었습니다. 협업이 비용이 아니라 레버리지라는 걸, 좋은 결과는 한 명의 영웅이 아니라 잘 엮인 팀에서 나온다는 걸 그때 처음 즐겁게 경험했습니다.

이게 네 명 중 가장 늦게 배운 강점이고, Lead PM이 된 지금 가장 크게 의지하게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혼자 더 잘하는 사람에서, 팀이 더 잘하게 만드는 사람으로 넘어가는 게 결국 이번 막의 핵심입니다.


새로운 막에서, 내가 다르게 쓸 것

이제는 저에게 권한과 역할, 책임까지 철저히 위임하는 리더를 만났습니다. 예전에 제 리더들이 저를 위해 펴주던 우산을, 이번엔 제가 누군가에게 펴주는 역할을 맡기도 하고, 방향이 크게 어긋날 땐 따끔한 한마디로 정신이 들게 하는 자리에 서 있기도 합니다. 엔딩 크레딧이 네 번째 리더까지 올라갔고, 이제는 시니어로서 새 막이 오른 셈입니다.

그런데 네 리더의 강점을 그러모으면 좋은 Lead가 될 것 같지만, 그게 끝이 아니라는 게 이번 회고의 진짜 결론입니다. 그분들이 나를 키운 건 AI가 실행의 많은 부분을 가져가기 전의 세계였습니다. 내가 Lead로 서는 무대는 조금 다른 무대입니다. 그래서 물려받은 강점을 그대로 쓰지 않고, 다시 번역하려 합니다.

  • 오기 → 그럴듯함을 의심하는 기준. 이제 그럴듯한 초안은 AI가 몇 초 만에 만들어줍니다. 분해서 더 잘 만드는 힘이 아니라, 매끈해 보이는 결과물 앞에서 "이게 정말 기준을 통과한 건가"를 한 번 더 묻는 힘으로 옮기려 합니다.

  • 관대함 → 빠르게 실험하게 하는 안전감. 팀이 AI로 더 과감하게 시도하려면, 틀린 시도가 처벌이 아니라 데이터가 된다는 안전감이 예전보다 훨씬 중요해집니다.

  • 명확함 → 무엇을 안 할지 정하는 힘. 변인이 수백 개라 공통인자만 깔끔히 추릴 수 없을 때, 무엇을 엣지로 두고 무엇을 후순위로 밀지를 판단하고, 그걸 설득력 있게 거절로 옮기는 일.

  • 협업 → 사람과 AI에게 각각 무엇을 맡길지 설계하기. 디자이너와 엔지니어가 내 그림보다 나은 안을 가져왔던 것처럼, 이제는 그 협업의 자리에 AI도 들어왔습니다. 어떤 판단을 사람에게, 어떤 작업을 AI에게 맡길지를 설계하는 게 새로운 협업이라고 봅니다.

지금까지의 리더들이 가르쳐준 건 PM이라는 직무에서 변하지 않는 것이었고, 내가 다음 막에서 더해야 하는 건 그것을 AI 시대의 언어로 다시 쓰는 일입니다. 토대는 그분들에게서 받았고, 그 위에 무엇을 올릴지는 이제 제 몫입니다.

이런 액션을 취해보세요

다음 단계를 앞두고 있다면, 본인만의 엔딩 크레딧을 한 번 써보세요. 거창하지 않아도 됩니다.

종이 한 장에 나를 거쳐 간 리더들의 이름을 적고, 각각 옆에 그 사람에게 받은 강점 한 단어를 붙여보세요. 그리고 마지막에 이 두 질문을 던져봅니다.

"이 중에서 다음 막에도 그대로 가져갈 것은 무엇이고, 다시 써야 할 것은 무엇인가요?"

이 작업을 하고 나면, 막연하던 "다음에 뭘 키워야 하지"가 구체적인 목록으로 바뀌어 있을 겁니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거. 너무 오래 고민하지 말자. 일단 해본다.

근데 말이죠

여기까지 읽으면 "이거 결국 자기 미화 아닌가요? 나쁜 리더 밑에서 고생한 걸 굳이 강점으로 포장할 필요가 있나요?"라는 생각이 드실 수 있습니다.

맞는 지적이에요. 모든 힘든 경험이 교훈은 아니었습니다. 어떤 리더는 그냥 사람을 소진시켰고, 거기서 배운 게 있다면 그건 성장이 아니라 상처를 견딘 흔적이거나 맷집일 뿐이었습니다. 나쁜 리더십을 "덕분에 컸다"로 미화하는 순간, 우리는 같은 방식을 다음 세대에 또 물려주게 됩니다.

그래서 이 글에서 말하는 회고는 "다 좋은 경험이었다"가 아니에요. 오히려 반대로, 가져올 것과 버릴 것을 칼같이 나누는 작업입니다. 오기로 몰아붙이던 리더에게서 기준의 높이는 가져오되 그 방식은 분명히 버리겠다고 말하는 것처럼요. 미화하지 않고 분해할 수 있을 때, 회고는 내 다음 막의 설계도가 됩니다.

주니어라는 막이 내려가고 있습니다. 엔딩 크레딧에 올릴 이름을 정리했다면, 이제 새 막의 첫 장면은 누구의 방식도 아닌, 내가 쓸 차례라는걸 이제야 알았습니다.

당신의 크레딧에는 어떤 이름들이 올라가 있나요. 그리고 다음 막에서, 그중 무엇을 다시 쓰실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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